박진혁은 임도운이 다시 방 밖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절묘한 때 걸려온 전화가 그에게 다시 문을 닫을 충분한 빌미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음 놓고 문에 기댄 것도, 아들과의 단란한 통화를 엿들은 것도 다 그 생각의 연장에 있던 행동이었다.

“너 엿듣고 있었어?”

“어.. 어.”

“왜?”

임도운은 당황하고, 조금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무작정 관계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잡고, 떨어지기 싫어 전전긍긍에 이제는 염탐까지. 그는 박진혁이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훨씬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궁금해서. 우영이가 뭐래?”

“뭐? 너도 보고 받잖아. 그걸로 확인해.”

“알았어.”

순순히 대답하면 이상하다는 듯 경계하는 얼굴이 보였다. 박진혁은 들어오지도, 그렇다고 비켜서지도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무단결근에 핸드폰은 꺼 놨으니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그는 쉽게 할 수 없었다.

금방 엿들은 통화가 그에게 현실을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와 있는 하루 동안 단 한 번도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던 임도운이었다. 호감을 표할 때 절로 쓰는 콧소리도, 낮은 웃음소리도 그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에겐 달랐다. 호응해주고, 관심을 주고. 바로 옆에 있는 그보다 이역만리 떨어진 목소리 하나가 더 영향력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속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이야기 좀 하자.”

“지금까지 했던 건 다 뭐야?”

진지한 얼굴에 임도운이 툴툴거렸다. 박진혁이 난감한 듯 웃었다. 둘은 다시 그 숨 막히는 정적을 달리던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붙어 앉지도, 같은 곳을 보지도 않은, 꼭 모르는 사이처럼. 할 말이 있다며 분위기를 잡은 박진혁은 금방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임도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너 진짜 회사 안 가?”

임도운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였다.

“안 가.”

“왜!”

“네가 도망 갈 거잖아.”

결국 물어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물어보면 박진혁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혼란도 불안도 사라진 눈이었다. 임도운은 본능적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박진혁이 나간다면 이 집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뛰어나갈 만큼 싫은 것도 아닌데, 그런 이야기는 해 주고 싶지 않아 마땅히 대답할 소리가 없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면 별안간 박진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스울 것 하나 없는데, 임도운이 몇 번이나 보여주었던 이상하다는 얼굴로 눈을 마주쳐왔다.

“다른 사람처럼 구는 거 너무 어색하다.”

포기한 듯 긴장을 내려놓으면 임도운이 놀란 눈을 했다. 그렇게 불안한 티를 내고 고집을 부렸으면서 쉽게 꼬리를 내리는 태도가 믿기 힘든 것 같았다.

“응.”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되는 게 아닌데,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지도 몰랐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나는 아직도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박진혁의 한 마디가 그들 사이의 간극을 좁혀놓기라도 한 듯 임도운도 솔직해졌다. 정말로 줄곧, 계속 이해할 수 없었다. 임도운은 박진혁에게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대하고, 배려 받는 것이 이상해서 오히려 불편했다. 그의 말에 박진혁이 양손을 마주잡고 깍지를 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신중하게 말하고 싶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도 계속 생각해 봤어. 내가 너한테 왜 이러는지. 왜 나답지 않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목소리 톤이 무미건조해지면 그제야 알고 있던 박진혁이 돌아온 것 같았다. 임도운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박진혁이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그는 거실장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제 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박진혁이 자신의 불안의 생김새를 차분하게 더듬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임도운에게 고백했다. 대책도 없이 처음 해 보는 일에 가슴 한 쪽이 술렁거렸다.

“우리가 이혼하면 너하고 우영이가 없어지잖아.”

“네가 언제부터 우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겼다고 지금,”

“그럼 나한테 회사는 저절로 없어져.”

“뭐?”

“너하고 우영이가 없으면 회장님이 날 사장자리에 그대로 둘 리가 없잖아. 이제 아무 연고도 없는 날 회사에 남겨봐야 후계에 위협만 될 뿐인데.”

“그런.. 그래서 나를 잡겠다고?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결국엔 또 회사야?”

마주보지 않아도 임도운이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은 뻔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불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못 견디는 그를 잘 알았으니 박진혁이 지금 상황에 나올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풋 웃어버렸다.

“내 인생에서 회사를 떼 놓고 생각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우선순위를 한 번 따져봤어.”

“뭔 소리야.”

“근데 회사가 없으면, 회사는 없어도 너하고 우영이는 남을 수 있겠더라고.”

임도운은 그가 들은 이야기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입만 뻐끔뻐끔하고 있으면 박진혁이 확연히 웃으며 덧붙였다.

“너는 지위나 역할로 사람의 필요성을 따지지 않으니까. 혹시나 내가 지금이라도 잘 하면 네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면 정말로 네 옆에 짝으로 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보였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어.”

“그게 무슨 개소리, 아니 너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어? 그거 꼭 네가 나하고 우영이한테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들려. 알아?”

“가지고 있어. 알아 네가 무슨 말 할지. 내가 그간 어땠는지도. 그래서 받아줄 때까지 사과하고 싶다고 한 거야.”

이별이 코앞에 닥치고서야 이별임을 아는 아이처럼, 그는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제대로 된 변명을 하고 싶었어.”

“그게 대체 무슨 변명이야. 이제 와서?”

“나 무단결근했어. 아니 하는 중이야.”

드디어 그가 눈을 마주쳤다. 임도운은 놀라고 흥분한 기색이 여전했다. 방금 그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색색, 숨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핸드폰도 꺼 뒀어. 아마 많이들 찾긴 할 텐데, 그 때는 러트 때문이었는지 불안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널 잡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 주이열씨가 가져 온 그 서류에 싸인하고 나니까 세상이 다 무너진 거 같더라.”

후후 웃을 일이 아니었으니 들리는 것은 억지 같은 소리에 가까웠다. 임도운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들은 게 뭔지. 지금 박진혁의 입에서 무단결근이라는 소리가 나온 게 맞나? 회사가 어쩌고 하는 소리랑, 자신과 아들에게 애착이 있다는 소리와..

어느 한 부분이 고장 난 기계처럼 머릿속에 들은 말만 뱅뱅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간의 생활들이 떠올랐다. 쉬는 날 하루 없이 다섯 시 출근, 열 시 퇴근. 회사를 위해 짝도 아들도 다 버리듯 굴 정도의 그 열정이 오히려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대체 회사가 뭐기에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것은 진짜 꿈과 열정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근데 뭘 했다고?

“네가 뭘 했다고? 회사에.. 뭘..”

“무단결근. 회장님이 아시면 가만두지 않겠지. 회장님은 완벽한 걸 좋아하시니까.”

“왜.. 지금 뭘.. 아버지한테서 회사를 빼앗으면 되잖아!”

“그렇겐 못하지. 그러길 원하지도 않잖아, 너.”

임도운이 아무렇지 않게 박진혁을 대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박진혁은 나쁜 놈이고, 사장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정말로 그에게 애정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가 어떤 짓을 해도 끝까지 악역으로 남아줄 사람. 그런데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괴로웠으면, 후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대상이 쉽게 항복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그러면서 박진혁의 말대로 정말 원하지도 않던 것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이때까지 열심히 한 건 다 회사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어. 솔직히 우리 아버지 회사랑 합병해서 성장한 것도 사실이고, 언젠가 우영이도 물려받을 테니 크면 클수록 좋지 않겠냐고.”

“그러면.. 그렇게 좋으면 네가 차지하면 되잖아. 아무리 아버지라도 너 쉽게 자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쉽게 자를 수 있으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런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아. 나보다 임회장님 리더십이 더 좋으니까 회사에 내가 필요 없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게 맞지.”

그는 단호했다. 너무 단호해서 거짓말인지 의심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임도운은 한 번도 박진혁이 회사에 대해 우스갯소리라도 나쁜 소리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들은 말도 진심이라는 말이었다. 놀란 마음에 절로 입만 벙끗벙끗 했다.

“이러나저러나 잃어버릴 회사라면 정말로 내게 소중한 게 뭔지 다시 따져보자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우스운 건 회사를 잃어버린다니까 허무한 기분이 들었는데, 너하고 우영이를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까 불안해지더라.”

갑작스러운 러트와 불안감이 만나 몹쓸 짓을 했다. 박진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막무가내가 된 것 같아. 너를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또 어색해서 불편하게 만들고. 근데 이게 정말 너를 괴롭게만 하는 거라면 내가 다시 생각해 보려고. 여기까지가 내 변명이야.”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 옅게 패인 눈주름 사이로 아쉬움이 엿보였다. 임도운은 할 말이 없어 그저 놀란 표정으로 상대방만 쳐다보고 있었다. 두렵고 피하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나쁜 놈일 거면 끝까지 나쁜 놈일 것이지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와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냐고.

그 와중에도 당했던 일들은 옅어지고 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쉽게 동정심이 드는 것 같아서, 임도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모질지 못한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됐어.”

“응?”

“됐다고. 이미 하기로 했잖아. 우영이 돌아오기 전까지 함께 해 보기로 했잖아. 네가 미련 남았는데 끊어내는 거 나도 부담스러워.”

만약 정말 이 모든 게 그를 속이는 거라면, 지금보다 훨씬 지저분한 결말이 있을 걸 알면서도 임도운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면 그의 뜻대로 하고서도 찝찝할 것을 아니까.

“고마워 임도운.”

차분하고 색깔 없는 눈동자는 그가 익히 보아오던 바로 그 눈이었다.

 

*


‘사고치는 사람 따로, 수습하는 사람 따로’ 라고 했던가, 박남주는 최근 며칠간 마음 졸인 것만으로도 날 때부터 타고난 담력을 전부 써버린 것 같았다.

월요일, 박진혁 사장이 무단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때마다 응답하는 것은 소리샘의 상냥한 여자였다. 삼십분 단위로 끊어져 있는 회의와 미팅은 전부 ‘러트 휴가’로 방어했고 외부 업체와의 골프 약속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인 영업팀의 기현호 부장이 대신했다.

사장님을 찾는 전화, 우연히 들른 손님. 박남주의 책상에는 전해야 할 메모만, 일정관리 프로그램은 뒤로 갈수록 빼곡, 핸드폰에는 받지 않는 전화기록이 늘어갔다. 다행힌 것은 금주는 회장님이 참석하는 회의 일정이 없다는 것, 그리고 사장님을 따로 찾는 일이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나름대로 능숙하게 대처했다고 할지 몰라도 상황은 겪어본 것 중 최악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임회장에 간을 졸이고, 윤덕기 상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기현호 부장의 위태로운 위치를 걱정하고. 박남주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매일 아침 박진혁의 출근해 있기를 기도하거나, 언제든 주인 없는 사무실 문이 열리길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영영 출근하지 않으면 어쩌지, 돌아와서도 수습이 안 될 상황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루가 꼭 한 달만큼 길고 길었다.

“네, 지금 러트 휴가 중이세요. 네, 이번에는 심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 전화도 꺼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네네. 아, 그러세요? 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금방 온 전화의 내용을 휘갈겨 쓰며 박남주가 어깨에 끼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거짓말도 반복하니 진짜처럼 술술 나왔다. 그래도 내가 업무 보조하는 직원인데, 말도 없이 결근은 심한 거 아니냐고. 잔뜩 쌓여 있는 메모 위에 성질부리듯 휙 던져도 그 메시지가 언제쯤 상대방에게 전달될지 그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내에 큰 이슈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지. 정말로 사장의 급한 결재가 필요한 건이 있었다면 직접 집으로 뛰어가야 할 판이었으니 그녀는 운동화까지 챙겨 들고 왔다. 제발 쓸 일이 없기를 간절하게 빌면서.

“바빠? 점심 못 먹어?”

갑자기 들려온 사람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 이호란이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동갑내기이자 입사동기인 그녀는 회장실 전담 비서였다.

“어, 아냐. 벌써 점심이네.”

“그것두 몰랐어?”

“응, 뭐. 전화 받다보니까.”

황급히 지갑을 챙기고 있으면 이비서 뒤로 고개 하나가 불쑥 더 들어왔다. 그녀 밑에 새로 뽑은 어린 남자는 같은 회장실 담당 김용우였다. 최근 회장실 업무가 많아지자 충당해 온 사람이라는데, 임원 중 누군가의 조카가 취직하지 못해 끌어왔다는 소리는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저건 또 왜 데려왔어. 박남주의 눈길에 이호란이 난감한 표정을 슬쩍 보였다. 회장님도 안 계신데 두고 올 순 없지 않냐며.

“안녕하세요오.”

“응.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선배님. 사장님은 오늘도 휴가이신가 봐요.”

“응, 러트가 심하신가봐.”

김용우가 반질반질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박진혁이 자리에 있다면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그녀의 습관을 알고 있었으니 그러지 않은 것에 의문을 표한 것이었다. 이미 박사장이 이틀간 출근하지 않았다는 소식은 회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눈치만 빨라서는. 박남주는 그의 찔러보는 듯한 말버릇을 참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얼른 가자. 나 배고프다. 응? 회장님 오늘 약속 있으셔서 오늘은 멀리 가도 돼.”

“그래, 가자.”

쓸데없이 더 캐묻는 것을 막으려는 듯 이호란이 깨방정을 떨면 박남주는 얼른 실내화를 구두로 갈아 신고 따라 나섰다. 평소라면 잠깐의 휴식에 기뻤을 일인데, 어쩐지 내도록 불편한 기분이었다.



박진혁 사장도 없고, 임태규 회장도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그들은 간만에 조금 멀리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샤브샤브 가게에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와서는 어쩐 일인지 김용우가 사내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씩 돌렸다. 별일이다 생각도 잠시, 그들은 경비실에 들러 담당 우편물을 잔뜩 찾았다. 한 손엔 커피, 한 손엔 서류를 들고 사장실에 잠깐 모여 구분을 하는데, 혹여나 사장님이 출근했을까 기대하던 박남주의 눈에 실망감이 도는 것을 김용우가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사장님은 언제까지 휴가시래요?”

“러트 휴가에 기간이 정해져 있나요. 일주일 내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거죠.”

이건 네거, 이건 내거. 회장님과 사장님 대상의 우편물을 구분하는 것을 김용우는 남 일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번을 알려줘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고, 이호란의 어마어마한 욕을 들어준 것이 바로 전 주의 일이었다.

“여태까진 잘 안 쓰시지 않았어요?”

“아예 안 쓰셨죠.”

“흠, 별 일이네요.”

입사한지 고작 두어달 된 사람이 뭘 안다고 찔러보는지. 박남주가 속으로 씹어대면 선임인 이호란은 숨김없이 그를 타박했다. 점심시간 내도록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용우씨는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사장님에 대해 잘 모르지 않아?”

“그건 그렇죠.”

“별 일은 이게 별 일이야. 아직까지도 우편물 구분을 제대로 못 하는 거.”

“하하, 죄송해요.”

낙하산이긴 해도 눈치는 있어서, 선임이 구박하면 절절 기는 시늉은 했다. 그래놓고서는 바로 다음 우편물을 반대로 놓아 혼이 나긴 했지만. 자꾸만 회사 정치 놀음에 아는 척 하고 싶은 심리는 충분히 이해했다. 김용우가 윤덕기 상무의 끄나풀이었으니까.

놀라울 정도로 사내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었다. 이호란도 박남주도 그가 낙하산이라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으니 지금의 관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심지어 김용우에게는 그런 태도를 숨길 의사조차 없어 보였으니 더욱 고까운 일이었다. 제 일도 제대로 할 생각 없으면서 쓸 데 없는 것부터 관심을 가진다고, 이호란이 한참 동안 메신저로 욕하는 것을 답해야 했던 것도 박남주 자신이었다.

“그런데 사장님 내외는 쇼윈도 아니었어요?”

“맞아요. 쇼윈도.”

“또 또. 김비서는 참 이래저래 관심이 많아?”

두 번째 잘못 분류한 우편물을 교정해주며 이호란이 또 그를 타박했다.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김용우는 기죽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으며 헤헤 소리 내어 웃었다. 박남주도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할 정도로 그는 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비서는 사장님한테 참 관심이 많네요?”

“사장님 대단하시잖아요. 일도 잘하시고 젊으시고, 잘생기시고. 게다가 회장님 사위라고 하니까 더 관심이 가더라구요.”

어련하시겠어. 박남주는 이호란의 눈이 말하는 것을 바로 읽어냈다. 김용우는 자신과 사장님이 둘 다 낙하산이라는 사실에 동질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박남주는 조금 불편했다. 사장님은 그처럼 일을 못하지도, 사족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대단하죠, 우리 사장님.”

“저도 사장님 비서부터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 딴에는 생각 없이 한 말일지 모르나 벼르고 있던 이호란이 보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박남주도 그녀도 비서라는 직무에는 철저한 편이었으니 현업은 따로 두고 사족부터 생각하는 신입의 태도가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일을 배우는 단계에 감히 누굴 모시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쉽게 하는지.

“김비서, 회장님 비서 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야?”

“아뇨, 아뇨. 그건 아니구요. 그냥 사장님도 모실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거죠~”

“아직까지 전화응대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사장님을 모셔.”

“아하, 하하. 그렇죠, 죄송해요.”

이호란은 속에 있는 말을 잘 참지 않았다. 그래도 낙하산인데 말 좀 조심하지, 걱정을 담아 눈빛을 보내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선임인데. 보란 듯이 뻐기는 표정이 돌아왔다. 박남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 이호란보다 김용우가 더 대단한 것은 제 머리 위를 오가는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눈치 없고, 적당히 일도 못하고. 회사 오래 다니기 딱 좋은 인재라고 박남주는 생각했다.

“어? 이건 뭐지? 선배님 이건 보낸 사람이 안 쓰여 있는데요?”

“어, 그러게. 퀵으로 보낸 건가?”

분명 임태규 회장이 받는 사람이었으니 제대로 온 건 맞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한 우편물이었다. 혹시나 이상한 물건이라도 들어있나 겉 부분을 만져보면 그저 작고 딱딱한 종이 뭉치가 느껴졌다.

“사진 같은데?”

“회장님이 따로 시키신 건 없었어?”

“응, 그런 건 없었어.”

사진 뭉텅이를 받는 사람 이름만 있는 봉투에 넣어 보낼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흥신소를 제외하곤. 박남주와 이호란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어차피 대표이사에게 가는 우편물은 전부 비서의 손을 거쳤다. 박남주가 자리에서 커터 칼을 찾아오면 이호란이 능숙한 솜씨로 봉투를 개봉했다. 찌이익, 만져 본대로 내용물은 한 뭉텅이의 사진이었다.

“이건..”

“사장님? 이거 사장님 아니에요?”

쏟아져 나오자마자, 첫 장부터 그들은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작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은 박진혁이었다. 다섯 장의 사진. 사진마다 사장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전부 달랐다. 그들은 한 눈에 봐도 작고 아담했으며 누구를 홀릴 듯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간혹 그들이 향하고 있는 가게의 간판이 찍힌 것을 보면 그 사진이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보였다. 검정색 바탕에 화려한 은색 필체로 쓰인 ‘SHINE’. 심상치 않은 눈빛이 김용우의 머리 위에서 만났다.

“이거, 이 사람들.. 오메가 같은데요? 여기는.. 꼭.. 알파 전용 퇴폐업소..”

“김비서님. 입 조심.”

후읍. 하고 숨 들이마시는 소리는 내는 것은 신입다운 행동이었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둘만 있었다면. 이호란은 박남주가 사장님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모시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제 상사를 열과 성을 다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박진혁을 곤란하게 할 사진들을 보게 된 지금 윤덕기 상무의 끄나풀인 김용우가 있는 것이 굉장히 난감해진 것이었다.

“누가 보낸 거지?”

차분하게 다시 봉투를 살펴보아도 보낸 이의 정보는 없었다. 누군가 익명으로 박진혁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박남주는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저 사진이 정말로 보여주는 그대로의 사실인지, 아니면 조작된 것인지 몰라도 하필 사장님과 연락이 안 되는 지금.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이거.. 이거 사장님 외도를 회장님께 알리려고 보내온 것 맞죠?”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김용우가 입을 놀렸다. 이호란은 인상을 쓰고, 박남주는 사진 한 번, 그 한 번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이미 윤덕기의 작은 귀가 이 사실을 모두 알았다. 이 상황에서 회장님께 가는 것을 막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녀가 머리를 굴리는 것을 알고는 이호란이 시간을 벌어다주기 위해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 적힌 것도 없이 퀵을 썼으면 아마도 보낸 사람을 찾아내긴 힘들겠다.”

“이거 정말일까요? 진짜 사장님이..”

“그러게.”

“받는 사람이 회장님이면 회장님께 보고 드려야 하는 건데.. 선배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으레 하듯이 떠보는 얼굴이 이번엔 이호란을 찾았다. 이호란이 몹시도 난감한 얼굴을 했다. 바로 앞에 박사장의 비서를 두고 바로 보고 드리겠노라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사적인 집안 이야기에 발 들여놓는 것도 꺼림칙했다.

“보고 드려야지.”

책상 밑으로 숨긴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는 데 반해 박남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놀란 눈들이 그녀를 찾았다.

“그치만, 이거 회장님께서 아시면 사장님이 곤란해지실 텐데요..”

“맞아, 남주야. 누가 보낸 건지도 모르는 걸 회장님께 불쑥 보고했다가 사장님은..”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위험물이 아닌 것만 확인했으면 그대로 보고 드리는 게 맞아.”

그래도 여우보단 호랑이가 먼저 아는 게 낫지. 박남주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덕기의 손에 박사장의 약점을 쥐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호란조차 평정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사이에 김용우가 또 치고 나왔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개인적인 일이 아닐까요? 이거 회장님께서 아시면 사장님 내외는 이혼하실 수도 있어요!”

“김비서님, 그건 김비서님이 판단할 일이 아니에요. 멋대로 숨기거나 파기했다가 후에 알려졌을 때 일을 감당할 수 있어요?”

박남주가 딱딱하게 이야기하면 그제야 둘 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박남주의 말이 맞았다. 숨길 수 있는지 여부는 둘째 치고 숨긴 후의 일을 감당할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이미 김용우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윤덕기에게 좋은 패를 선점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도 그렇네.”

이호란은 제 상황이었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맞장구로 돌려주었다. 박남주의 진지한 눈이 그녀와 딱 맞았다.

“남주 말이 맞아. 우리는 이대로 보고합시다.”

김용우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결국에는 말을 아꼈다. 박남주의 얼굴에는 더더욱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한 판단이 차악이기를, 마음속으로 몹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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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둥!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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